OHTAEHWAN

조지아 독감이 뉴욕을 휩쓴다. 전 세계로 퍼져나간 바이러스는 21세기 문명을 순식간에 파괴한다. 세계 인구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실종된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을 택한다. 누군가는 공항에 남고, 누군가는 떠난다. 공항 사람들은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삶의 방식을 교류한다. 사슴을 사냥해 가죽을 손질하고, 내장을 발라내 개에게 주는 방법을, 누군가의 삶에 대해 깊게 묻지 않는 방법을 배운다. 질서를 깨뜨린 강간범의 호소를 묵살하는 냉정함까지도. 이들의 질서와 가치는 우리가 살아왔던 문명,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그들은 오직 이 관계를 유지하고, 기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여러 수집품들을 모아 박물관에는 아이패드, 스마트폰, 바이크, 안락의자, 주식회사의 비밀이 담긴 찌라시와 보고서, 누군가의 여권과 신용카드까지 모두 전시되어 있다. 오늘도 그들은 유물이 되어버린 것들의 먼지를 턴다. 오로지 잊지 않기 위해서다. 어쩔 수 없이 살아남은 이들이 저마다의 삶을 위해 나아갈 때, 기억은 그들이 가진 유일한 나침반이 된다.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를 떠돌며 무대를 만드는 유랑극단이 있다.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공연한다. 관객은 그리 많지 않다. 유랑극단과 관객 모두에게 셰익스피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과거일뿐이다. 유랑극단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상영하는 이유는 늘 그래왔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유랑극단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희곡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실패한다. 어떤 문장을 써내려가더라도, 반평생을 연기해왔던 셰익스피어의 자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유랑극단은 예언자가 지배하는 마을에 도착하고, 예언자가 유랑극단 중 한 명을 아내로 요구한다. 거절과 동시에 그들은 예언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조지아 독감이 가져온 종말은 비슷했지만 주인공들의 기억은 다르다. 커스틴은 어릴 적 아서가 넘겨준 만화책을 통해 세계를 기억한다. 안타깝게도 이 만화의 결말은 없다. 뒷이야기는 그녀를 비롯한 생존자들이 적어내야만 한다. 공항에 남아있던 한 소년은 늘 성경을 놓지 않았고, 성경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는 신이자 예언자가 된다. 사람들을 지배하고,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여성들을 납치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희망을 지배하는 동시에, 모두의 희망이 되기를 원한다. 클라크, 지반, 어거스틴, 디터 모두에게 기억은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된다. 정말 대단한 헤프닝이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올 때까지 그들은 기억을 붙잡으려 한다. 

먼지가 흩날리는 폐허, 길거리에 널린 시쳇더미,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희망을 붙잡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전기를 발견하고, 불을 피워 빵을 구워 이웃에게 나눈다. 그들은 생존을 넘어 더 큰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커스틴의 팔에 새긴 문신처럼, 생존만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 뿐이다.

블랙베리를 사용하면서 느낀 장단점, 눈에 들어오는 특징을 정리하자.


- 카메라는 키투가 훨씬 낫다. 특히 인물모드, 아웃포커싱은 굉장히 잘 되는 편. 오히려 아이폰보다 자연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다.
- 다만 야간 카메라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구리다. 노이즈도 많이 생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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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이니치

 

코지는 말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자이니치라는 말은 들어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자이니치는 무엇인가? 재일(在日) 한국인과 북한인 등을 지칭하는 일본말이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시절부터 현재까지 일본에 살고 있는 한반도출신자들을 일컫는다. 대부분의 자이니치들은 일제강점기에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거나, 2차 세계대전 이후 강제 징용에 의해 끌려갔다.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 현재 그들의 2세들이 일본에 머무르고 있다.


자이니치는 이러한 사람들의 삶을 다룬 연극이다. 야쿠자였던 둘째 히사시의 죽음을 통해 첫째 이치로, 셋째 카네토, 넷째 토모야키, 막내 코지가 한 자리에 모인다. 히사시의 장례식장에서 만나고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2. 일본과 한국, 조총련과 민단

 

자이니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성이 넘친다. 그들은 정()이라고 통용되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형제들의 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립각을 세우며 끊임없이 싸운다. 그들은 서로에게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공통분모가 나뉘어져 있다.


우선 국가다. 관객들은 극의 시작에서 나오는 일본어와, 그들의 히사시의 죽음을 대하는 장례식장의 풍경을 볼 때 그들의 국적을 일본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위에서 짚었듯이, 이치로, 히사시, 카네토, 토모야키, 코지는 자이니치이고, 그들의 국적은 한국이다. 영화 기업가 박기환 역시 한국인이다. 애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국적은 모두 한국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이질감 없이 한국인이라고 느낄 수 있는 인물은 박기환 한 명 뿐이라는 점이다. 박기환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히사시의 지원을 받는다. 영화는 실패하게 되면서 그는 20억이라는 큰 액수의 빚을 지게 된다. 빚 탕감을 위해 그의 유골을 운반하는 업무를 맡는다. 박기환은 자이니치 4형제를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극의 후반부에서 여권을 꺼내든다. 애국가를 부르며 형제와 자신간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구분한다. 극 중 내내 다소 비굴한 태도를 일관하던 박기환의 태도는 극 후반부, 진실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변한다. 그는 이 시대의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이익, 박기환의 대사를 빌리자면 비즈니스의 논리로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는 자이니치에 대한 고려가 없는 인물이다. 민족적 정체성과 그에 따른 상황들, 혹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고려는 보여주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자본의 원리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극 중에서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협상을 돌리기 위해 자신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코지에게 더욱 호감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거리감은 그들이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장소에 기인한다. 박기환과 코지는 둘 다 한국에서 살아가고 활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코지와의 교감은 무너지고 만다. 코지가 마지막에 떠나는 박기환에게 소리치는 대사는 일본어다. 물론 극 중 등장하는 일본어는 셋째 카네토의 개입으로 인해 대부분 번역되지만, 마지막에 코지가 날리는 대사만이 온전한 일본어로 남는다. 그 일본어 대사의 뜻은, ‘나도 한국인이라고! 우리 형제들 패스포트 따위 없어도 모두 한국인이라고!이다. 극 중 온전한 일본어로 드러나는 이 대사는 결국 일본어로 남아 관객에게는 완벽하게 전달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박기환을 제외한, 형제들의 관계는 어떤가? 그들이 나뉘는 기준은 이데올로기다. 카네토와 토모야키는 조총련 소속이다. 친북한계 단체다. 셋째 카네토의 말투 억양은 다소 독특하다. 조국에 대한 배신을 언급하는 그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지향성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치로와 코지는 민단 소속이다. 민단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줄임말로, 조총련과 마찬가지로 재일한국인을 위한 단체이지만 서로의 정치적 노선,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조총련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데올로기는 양분화가 불가능한 개념이다. 그러나 극 중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눈에 띄게 선명하다. 특히 형제들이 주고받는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토모야키에 비해 카네토는 더욱 확실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치로와 코지를 조국을 배신한 자들로 몰아간다. 이치로와 코지는 다르다. 코지는 재일동포 야구선수로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자본주의적 논리에 편입해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극 중에서 가장 관객들과 거리감이 없는 인물로,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타당한 방법으로 한국 사회에서 적응을 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장 크게 대립하는 것은 코지와 나머지 형제들이다. 코지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형제들과 공통분모를 두지 않는다. 그것은 온전한 자신의 몫이다. 극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코지가 느꼈을 외로움과 자이니치로써의 정체성 혼란 등을 예상할 수 있다. 그것들을 이겨내고 온전히 자신의 몫을 쟁취한 코지로써는 형들의 선택이 다소 강압적이고,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가 자신의 의견을 돌리는 것 역시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관념의 경계선은 형제들과의 공감과 사랑이 확인될 때 거품처럼 사라진다. 카네토와 토모야키 역시 코지의 성공을 인정한다. 공감이 이루어진 순간, 이데올로기는 필요 없다.

 

3. 우매보시

 

토모야키는 코지를 위해 유골을 일본에 뿌린다. 극 후반부에서 유골을 대신하는 것은 우매보시이다. 우매보시는 매실이다. 같은 열매이지만 국경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갖는다. 우매보시의 언급은 극 중 다소 직접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주제를 핵심적으로 전달하는 상관물이다.


자이니치들은 뭐라고 불리는가? 한국에서는 재일 동포로, 일본에서는 자이니치로 불린다. 그들은 온전한 한국인 혹은 일본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우선 한국을 보자. 다소 서투른 한국말 실력을 제외하고라도 그들은 애한국인으로써의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조건은 민족적 정체성이다. 우리는 수없이 단일민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언론과 미디어, 교과서가 그렇다. 현재 발생하는 다문화 현상과 그에 따른 문제들 역시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사회적 풍토에 책임을 요구하는 경향이 나타나곤 한다. 재일동포들은 겉모습으로는 일본과 한국을 구분할 수 없다. 그들이 일본과 한국의 언저리에 위치한 것은 자의도 분명 존재하지만, 타의로 진행된 점이 더욱 크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과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만들어낸 비극적인 결과다. 일본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일본과의 역사적 측면에서의 접점과 굴욕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운명 역시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큰 측면에서는 국가와 국가, 혹은 사회와 사회 사이에서 희생된 희생자들이다. 일본에서의 경우 마찬가지다. 자이니치들은 우리 주변에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역시 차별과 멸시를 받는다. 대표적인 예로 추성훈을 들 수 있다. 추성훈은 일본에서 운동을 시작했지만 한국으로 건너온다. 그러나 유도계에서의 파벌 싸움, 국적과 정체성에 대한 멸시와 차별 등으로 다시 일본으로 귀화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조센징, 한국에서는 쪽바리로 멸시를 받는다. 그는 2001년에 37개월간의 활동을 마치고, 귀화를 조건으로 일본 대표 선수가 된다.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선수 안동진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건다. 이충성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대표팀 예비 선수 시절을 고백한다. 일본에서의 멸시를 피해 한국에 동경을 가졌지만, 막상 한국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의 경험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어디에도 소속감을 갖지 못하는 자이니치들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자이니치의 상황은 단순히 스포츠에서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주변에 있는 일반적인 자이니치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일본에서는 우매보시, 한국에서는 매실이다. 우매보시와 달리 자이니치의 삶은 사뭇 다르다. 각각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우매보시와 매실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은 한국에서는 쪽바리,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다. 코지의 성공 역시 두 스포츠스타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성공에 대한 자부심과, 형들과의 연대를 거부하는 코지의 행동의 근거가 된다.

 

4. 임진강

 

그들이 15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것은 둘째 히사시의 죽음 때문이다.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그들이 그 전까지는 교류가 없었음을, 서로에게 그리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은 형제간의 냉기류와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그들의 다툼이나 우스꽝스러운 농담들, 관객들이 흥미를 갖는 포인트 역시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히사시의 유언이 장례식장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유언은 다음과 같다. 각 형제들이 자리에 모여 한 끼 식사를 같이 하는 것, 자신이 좋아했던 춤을 추는 것, 임진강을 불러줄 것이었다. 물론 토모다키가 쓴 유언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효력은 없다. 허나 토모다키의 대사를 통해 히사시가 늘 원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유언을 이행하는 형제들의 모습과 그에 따른 다툼이 극을 이끌어간다.


극 중 노래에 등장하는 임진강은 함경남도와 황해북도, 파주를 잇는 강이다. 이 강을 한국과 북한의 영토 중 어디인지 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미 인위적으로 세워놓은 삼팔선을 관통하는 강이기 때문이다. 자이니치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이니치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 그 언저리에서 흘러가는 강이다. 그들의 정체성과 국적을 의도적으로 구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임진강을 나눌 수는 없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의 초반부와 후반부에서 기타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임진강의 노래는 의미심장하다. 임진강은 자이니치들의 현재 입장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들 사이에서 발생했던 나름의 생존 방식과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툼이 해결을 맞는 순간은 굳게 닫혀있던 마음이 이해를 거쳐 공감으로 향하는 순간이다. 공감을 이루는 조건은 바로 히사시의 죽음이다. 피가 섞인 형제들의 죽음이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당연한 감정 중의 하나다. 히사시의 죽음은 쓰나미라는 소재와 방사능으로 오염된 후쿠시마의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의 패권 다툼이나 형제들의 개입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히사시의 죽음으로 15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다. 또 하나는 박기환의 존재다. 박기환은 그들의 갈등을 중재하는 중재자로 등장하지만 결말부에서 그는 그들을 배신한다. 자본주의 논리, 즉 자신의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떠난 박기환을 붙잡지 못한다. 그들 사이에 공감대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뿌려진 유골을 대신해 그들이 넣는 것은 손톱과 머리카락, 그리고 우매보시 씨앗이다. 손톱과 머리카락은 국가와 사회로 구분되지 않는다. 인간이 가장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신의 흔적과 뿌리이다. 자신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을 유골 대신 넣는 것이다. 우매보시 역시 마찬가지다. 위에서 짚었던 것처럼 우매보시는 그들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상관물인데, 유골 대신 들어가는 우매보시 씨앗은 그 어디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그들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좁혀질 것 같지 않던 간극이 좁혀지는 순간, 그것은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들을 감싸고 있던 방어기제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고, 서로 발을 붙이고 사는 장소에 대한 구분이 사라졌을 때이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의 긍정적인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현재 자이니치들의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가슴 아픈 결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공감과 이해

 

이 연극을 통해 자이니치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그들의 삶이 바뀔 수 있을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코지는 말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자이니치라는 말은 들어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자이니치는 우리에게 분명 가까운 사람들은 아니다.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저 어렴풋이 남아있는 흐릿한 사람들일 뿐이다. 우리는 이 연극에 공감할 수 없을지 모른다. 설령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비윤리적인 사실은 더더욱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접점이 없는 것은 사실이니까. 우리는 그것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 연극과 소설, 시와 같은 문학을 통해서, 혹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것이 자이니치의 삶이다. 그것은 그들이 겪을 수많은 삶의 단면들 중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같은 생물학적 조건을 갖고 태어난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것은 후천적인 환경적 조건이다. 코지의 성공은 그것들에 대한 냉정한 통찰이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조건을 딛고 단일민족한국인에 비해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다. 성공은 필수 조건이 국적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서 과연 우리에게 책임감이 없을까. 글쎄, 냉정하게 말하자면 전혀그렇지 않다.

 

음악


솔 뮤직1950년 대 말, 노예제도 하에서 탄생한 미국 흑인들의 음악으로 리듬 엔 블루스와 가스펠송을 결합한 새로운 음악 장르. ‘영혼을 뜻하는 음악인만큼, 어떤 하나의 스타일과 기술이 기준이 되는 음악 장르가 아니며,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소리와 리듬으로 이루어진 음악으로 평가된다. 야마다 에이미의 단편집, 솔 뮤직 러버스 온리에서 음악은 꽤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았던 음악은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에서 등장한 Percy Sledge‘When A Man Loves A Woman’인데, 온 몸에 물감을 묻히며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사랑은 음악의 경쾌함과 잘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소설 내 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인물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거나, 끝없는 절망에서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는 탈출구 역할이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것은 섹스. 그들에게 솔 뮤직은 곧 섹스이며, 사랑과 섹스는 곧 서로의 영혼에 대한 애무가 된다. <솔 뮤직 러버스 온리>의 단편들을 섹스라는 기준으로 나뉘어 분석했다.

 

섹스1: 서로를 애무하다.


섹스는 줄곧 대화로 표현된다. 말과 말로 전달할 수 없는, 서로의 깊숙한 곳에 있는 무언가를 탐닉하며 알아내는 것, 그것이 섹스다. 섹스는 곧 부부의 것이라는 사회적 약속처럼, 그것은 서로에 대한 안정적인 감정을 확인하는 일인 동시에, 자신의 성욕이 아닌 외로움과 일종의 감정을 분출하고 보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 역시 존재한다. 단편집에 수록된 인물들 모두 섹스에 대한 자유로운 관념과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WHAT’S GOING ON을 살펴보자. 아이다는 클럽, 혹은 바에서 남자들의 시선을 즐긴다. 그녀는 클럽에서 숱한 남자들을 만났고, 그들과 하룻밤을 보냈다. 로드니는 아이다가 만난 남자 중 한 명이다. 아이다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밤의 생활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아이다는 로드니에 대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 반면 로드니의 생각은 다르다. 아이다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다른 중년 여성과의 자리를 들킨 로드니는 차를 사기 위해서라는 변명을 내뱉지만, 아이다는 그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오랜만의 재회에서, 아이다는 로드니에 대해 회상하며 자신의 감정을 다시 확인한다. 아이다가 철없는 기억으로 치부하는 회상 속에서 로드니에 대한 감정은 번뜩인다. 그 감정은 안정된 생활을 이룩한 현재의 삶에서는 없는 것들이다. 아이다는 로드니와의 감정을 그저 단순하게 치부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며, 그 때 로드니가 보여주었던 모든 것들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다는 이제 나도 자격이 있는 거야‘, 라며 떠난 로드니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곧 그녀가 철없는 시절로, 혹은 별 것 아니었던 것으로 치부했던 로드니와의 만남이 사랑이었음을 인정하는 순간이며, 로드니에 대한 마음을 열어두는 소통이 된다.


PRECIOUS PRECIOUS의 배리는 외톨이, 못난 남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늘 집에만 틀어박혀 가족들의 걱정을 산다. 친구들은 늘 말이 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배리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을 만들어내지만, 정작 그는 알지 못한다. 배리가 사랑한 여자는 자니르다. 자니르는 그에게 여신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신이 아니라, 그가 다가갈 수 없는 거리와 위치에 있는 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리가 자니르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스스로에 대한 위로, 즉 자위행위다. 이 장면에서 배리로 대표되는, 남성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프레임이 잘 드러난다. 그것은 성녀 혹은 창녀의 프레임이다. 배리는 자니르를 자신이 다가갈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놓는 동시에 그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반면 상상 속에서는 자니르를 늘 자신을 압도하는 성적인 존재로 만든다. 배리의 자위행위는 오로지 상상으로써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는 것이며, 그것이 곧 현실로 돌아올 때 허무함은 배가 된다. 자위행위는 소통이 아닌 홀로 내뱉는 독백에 될 뿐이다. 배리는 우연한 기회로 자니르와 만날 기회를 갖는다. 그 과정은 온전히 그의 용기로 이루어진다. 그가 했던 행동 중 가장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것이지만, 배리의 이미지는 이미 주변 사람들의 의견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배리는 오로지 상상 속에서 자니르를 만들어내고, 자니르는 타인들이 내뱉는 말과 소문 속에서 배리를 만들어낸다. 거울 속 배리의 얼굴은 나쁘지 않은 사람으로 변해있었지만, 그것은 곧 진정한 배리가 아닌, 타인들이 만들어낸 배리가 된다. 그들은 온전히 서로를 이해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PRECIOUS PRECIOUS의 배리와 FEEL THE FIRE의 이반의 행위는 분명 비슷한 지점이 존재한다. 서로에 대한 소통의 맥락이 되지 못한 채, 온전히 한 쪽에서 고여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루퍼스는 소니, 이반과 모두와 친했지만, 늘 이반이라는 여성과, 완전한 사랑의 관계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다. 이반은 사랑했던 소니를 잃는다. 루퍼스는 상심한 이반의 집으로 찾아가고, 소니에 대한 기억의 퍼즐을 맞추며 감정적으로 가까워진다. 루퍼스는 자신이 소니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불경스러운 일임을 알면서도, 소니에 대한 죄책감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다. 루퍼스는 조심스럽게 이반에게 소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꺼내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반의 거친 반응뿐이다. 루퍼스는 우연히 이반의 자위행위 장면을 보게 된다. 이반의 행위는 배리의 행위와 표면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배리의 행위는 비어있는 것들을 채워가는 행위다. 배리는 자니르에 대한 표면적인 것들을 맞추어가는 것으로 자위행위를 시작한다. 반면 이반에게 소니는 이미 완성된 것들이다. 그녀의 자위행위에는 사랑과 추억이 있고, 서로 몸을 섞었던 따뜻함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순간의 사고로 끝나버리고 만다. 이미 완성되어 있던 것들이 사라졌을 때 남은 공허함, 이반의 자위행위는 그러한 공허함에 맞서는 채우기의 과정이 된다. 루퍼스는 이반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자신의 존재를 믿는다. 둘은 몸을 섞는다. 그것은 곧 서로에 대한 것을 확인하는 작업인 동시에, 서로의 깊은 곳에 간직한 공허함을 채우는 과정이 된다.


이반에게 루퍼스가 있다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의 윌리 로이 역시 주인공 에게는 그러한 존재로 기능한다. ‘는 윌리 로이의 등장을 반기지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매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는 이미 마이크라는 남자친구가 있다. 윌리 로이는 의 그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섹스가 아닌 대화를 한다. 그와의 섹스 도중, ‘는 그림에 대한 고뇌와 미래에 대한 회의감을 털어 놓는다. 윌리 로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간다. 윌리 로이는 섹스가 가진 힘을 알고 있다. 무분별해질수록 서로를 파고드는 지점들은 많아질 것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그는 사랑은 하더라도 섹스는 하지 않을 수 있다고 확신하며, 섹스를 전략적으로 계획하고 활용한다. 반면 는 윌리 로이에게서 받았던 따뜻함을, 윌리 로이가 자신을 이해했던 순간을 섹스로 기억하고 있다. 윌리 로이가 떠났을 때, ‘는 어느새 완성되어 있는 캔버스를 본다. 그녀가 그리고자 했던 그림은 윌리 로이와의 섹스로 완성된다. 그것은 곧 대화였으며, 그녀의 고뇌와 공허함을 채워주었던 위로였던 셈이다. 그림은 그녀와 윌리 로이가 함께 그린 것이다.

 

섹스2: 한계를 확인하다.


위에서 언급했던 네 작품들이 위로라는 이름의 섹스를 보여주고 있다면, 다음 네 작품ㅇ의 키워드는 한계다. 섹스는 자신의 한계, 관계의 한계를 확인하는 탐색이 된다. 그들은 온전한 대화와 서로에 대한 확신 대신 허무의 늪으로 빠져든다. 서로에 대한 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 되지만, 정작 섹스 후 그들은 더욱 멀어지며, 결별을 맞고 만다.


ME AND MRS.JONES의 윌리는 존스 부인을 사랑한다. 윌리의 친구들은 대부분 존스 부인과 몸을 섞었던 경험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존스 부인은 그들의 호기심과 성욕 해소의 대상이며, 그들이 함부로 폄하할 수 있는 여자가 된다. 윌리는 성 경험이 없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존스 부인의 집에 가게 되고, 존스 부인과 사랑을 나눈다. 윌리는 존스 부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확신한다. 정작 존스 부인은 다르다. 존스 부인과의 관계가 채 일 년이 되기도 전에 윌리는 이별 통보를 받는다. 존스 부인은 남자의 몸은 반년이면 돼. 그 다음에는 마음이 필요하거든.’(47)이라는 말을 남긴 채로 윌리를 떠나보낸다. 윌리는 존스 부인의 마음을 갈구하지만, 존스 부인은 윌리를 성적인 대상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윌리 친구들의 존스 부인에 대한 평가가 뒤집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윌리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섹스는, 친구들이 말한 쾌락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결국 윌리는 존스 부인에 대한 가질 수 없는 한계를 깨달은 뒤 쓸쓸히 집으로 돌아온다.


검은 밤의 조니 다크윈 역시 비슷하다. 윌 리가 존스 부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반대로 티나가 조니 다크윈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작품은 전개된다. 티나는 조니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는 친구 그로이스와 집단 섹스를 벌이며 쾌락을 만끽하는 삶을 산다. 티나는 조니가 자신이 아는 그런 남자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며, 조니의 순수함에 빠져든다. 조니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개인적인 것들을 털어놓고 싶어 하며, 한 순간의 쾌락이 아닌 온전한 관계를, 섹스가 아닌 마음을 원한다. 그녀는 그러한 조니의 태도에 부담을 느낀다. 그녀는 조니의 몸에 관한 구체적인 기억 말고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59)고 말한다. 그녀에게 조니는 그저 경탄을 내뱉을 만큼 탄탄한 몸을 가진 흑인 남자일 뿐이다. 조니는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며, 티나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의 이야기는 티나가 그를 떠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자신이 농구를 하고 있다는 것,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 그것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들의 발현이다. 티나는 조니 다크윈을 사랑한다는 어떠한 태도도 취하지 않는데, 왜 눈물을 흘렸던 것일까. 개인적으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싶다. 첫째는 조니와는 진정한 사랑,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온전한 관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을 알기에 흘린 눈물이다. 두 번째는 조니가 떠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자신이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때의 눈물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그녀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두 이유는 결국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MAMA USED TO SAY의 브루스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확인한다. 대상은 아버지의 여자, 도로시다. (표면적으로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시키는 이 인물들의 관계는 흥미롭다. 브루스는 도로시를 사랑하지만,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그럼에도 육체적인 관계는 지속된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선을 그어왔던 도로시 역시 암묵적으로 브루스와의 육체적 관계를 동조한다. 그러나 브루스는 도로시의 마음까지는 얻지 못한다. 도로시는 여전히 아버지의 여자이며, 도로시와의 섹스는 그녀가 아버지의 여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의 반복일 뿐, 그 어떤 의미도 도출해내지 못하는 쾌락의 늪이 된다. 브루스는 도로시의 성적인 매력을 탐미하며 그녀를 성적으로 폄하한다. 그녀 역시 여자에 불과하다는 것. 이것은 브루스가 그녀를 갖지 못하는 대신 그녀에게 내리는 평가다. 생활은 평화롭고, 여전히 도로시와는 몸을 섞지만 브루스는 도로시의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이는 존스 부인을 바라보는 윌리의 시선과 흡사하다.


GROOVE TONIGHT는 어떤가. 커티스가 데니스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커티스의 데니스에 대한 욕망을 그리고 있다. 커티스는 클럽의 디제이다. 작은 유리 상자 안에 갇혀 클럽에서 춤을 추는 남녀를 바라본다. 그는 마치 욕망을 감추듯, 묵묵히 음악을 바꾸고 랩을 만든다. 그의 욕망을 깨운 것은 데니스다. 데니스는 애인이 있고, 다른 남자들 역시 데니스를 성적 대상이 아닌 경외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데니스는 그러한 남자들의 태도가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 데니스는 커티스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삶의 국면을 맞이하지만, 정작 커티스는 데니스에게 심한 집착을 보이며 깊은 회의감에 빠져든다. 이미 애인이 있는 데니스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은 집착을 더욱 심화시킨다. 집착은 곧 폭력이 되고, 데니스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섹스1이 서로에 대한 모든 것을 확인하고, 탐색하는 작업이라면 섹스2는 공허함을 건져 올리는 과정이다. 공허함은 서로를 가질 수 없다는 암묵적 동의인 동시에, 자신들의 마음의 거리를 인정하는 순간이 된다. 그들에게 섹스는 쾌락이 아닌 허무로 빠져드는 늪이 된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네 작품들 중 대부분 그러한 절망을 경험하는 것은 남자라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보인다.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철저히 대상화 되어있으며, 그녀들을 온전히 가지기 위한 방편으로 섹스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온전히 한 개인으로써 존재하고, 섹스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기억에 남는다. 또한 여성들은 모두 안정된 파트너를 갖고 있다. 존스 부인은 남편을, 티나는 약혼남을, 도로시는 남편을, 데니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 나름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인물들인 동시에, 나름의 일탈을 꿈꾸는 인물들로 나타난다. 그녀들의 삶은 남성들에게 가질 수 없는 보석과 같은 기능을 하는 동시에, 성적인 대상으로써의 폄하와, 질투와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온전한 허무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도착적으로 섹스를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더욱 큰 허무함의 틀 뿐이다.

 

글을 마치며


섹스라는 기준을 통해 거칠게 작품들을 분류하며 놓친 것들 역시 많았다. 우선 야마다 에이미의 거침없는 성애묘사는 탁월하다. 마치 인물을 탐닉하듯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묘사들은 특히 섹스를 비롯한 사랑의 과정에서 탁월한 포착을 보여준다. 또한 다소 가벼워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적 자의식을 갖춘 신선한 표현들 눈에 띄었다. (BULL SHIT!!!!) 이국적인 배경과 인물들의 명칭 역시 새롭다. 이국적이면서도 퇴폐적인 분위기의 공간과 인물들은 야마다 에이미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과 잘 어우러지는 동시에, 간접적으로나마 사랑과 섹스에 대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각의 단편들은 잘 읽히는 소설인 동시에, 단순히 섹스에서 그치지 않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무언가는 위에서 언급했던 솔 뮤직의 정의를 빌려 말하고 싶다. ‘영혼을 뜻하는 음악인만큼, 어떤 하나의 스타일과 기술이 기준이 되는 음악 장르가 아니며,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소리와 리듬으로 이루어진 음악. 이들에게 사랑과 섹스는 솔 뮤직이며, 그들의 본능과 표현에 가장 밀착한 표현의 형태로 남아있었다. 다양한 사랑의 양태와 세밀한 감정들은 과감한 성애묘사와 자극적인 문장들 사이에서 온전히 살아남아, 독자들을 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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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류를 처음 만난 것은 <남자는 쇼핑을 좋아해>라는 에세이였다. 이탈리아 남자들은 푸른색 셔츠를 입는다, 라는 작은 발견에서 시작해 옷과 패션, 남자라면 가끔은 상상할 수 있는 멋진 나날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좋은 호텔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서 위스키를 마시고, 이탈리아 세리에 A리그에서 뛰는 일본 축구 선수의 경기를 보러가거나, 최고급 실크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는 일 같은 것들. 뭐든 성별의 영역으로 단정짓는 것은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위스키, 축구, 셔츠와 넥타이가 주는 남자의 로망스는 존재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로망스보다는 허세에 가깝지만.


<자살보다 SEX>는 무라카미 류의 연애 에세이다. 20대부터 중년으로 접어드는 지금까지, 27년 동안 수많은 매체의 지면에서 발표해온 연애, 섹스, 여성에 관한 에세이를 한 권으로 집대성했다. 유년기 근친상간이 남긴 트라우마, 여성의 스톡홀름 증후군, SM클럽 마니아, 미성년자의 매춘, 주부의 불륜, 신혼여행지에서의 파국 등 과격한 성 담론을 쏟아내기도 한다. 유명 작가, 혹은 영화감독으로서 수십 개의 나라를 여행하며 겪은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 야마다 에이미, 요시모토 바나나, 우치다 기쿠 같은 동료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감상, 개인적인 친구들과의 일화 등도 자세히 소개되어있다.


무라카미 류가 말하는 자살은 무기력함이다. 손목을 긋거나, 수면제를 털어넣는 것 말고도 스스로를 내려놓는 모든 것이 자살이 될 수 있다. 연애를 하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거나, 스스로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자살과 다름없다. 섹스는 자살의 반대말이다. 섹스와 연애, 사랑은 서로에 대한 가장 내밀한 대화다. 이는 상대방을 발견하는 것을 계기로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무라카미 류가 바라본 많은 일본 젊은 세대는 무기력함에 젖어있다. 섹스 대신 오나홀을 구입하고, 연애 대신 원조교제를 한다. 사랑할 수 없는 것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랑은 때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하는 숭고한 일이다. 그 위험을 감수해야할 이유를 모른다면, 사랑은 그저 드라마에서나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무라카미 류는 자칭 꼰대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날카롭게 포착하는데, 이는 근대화가 이후 굳어버린 일본 사회, 규칙과 제도 앞에 스스로를 함몰시켜버린 몰지각한 개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글은 무라카미 류의 옛 애인, 리카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탈리아에서, 브라질에서, 혹은 스키장에서 그는 리카에게 많은 편지를 쓴다. 편지의 내용은 그녀가 그립다는 것인데, 그리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무척 적나라하면서도 아름답다. 그는 리카의 본명도 떠올리지 못한 채, 그저 작은 유두를 가진 여자로 기억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리카를 사랑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가장 원초적인 사랑의 형태, 그리움에 대한 쓸쓸한 문장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울 수밖에 없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닮았다.


그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하던 그것은 중요치 않다고, 무라카미 류는 말한다. 스스로를 내려놓을 바엔, 누군가와 섹스를 하라고. 아침에 마시는 따뜻한 커피와,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 누군가에게 둘은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어떤 것도 자살보다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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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누구에게나 우연히 찾아온다. 누구라도 삶의 첫 시작을 다짐하며 어떻게 살아가겠노라고 결심할 수 없다.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직면하는 순간은 이미 삶이 시작되고 난 이후다. 인간이 하나의 생명체로 잉태되는 것 역시 인간 본인의 결정이 개입되는 것은 아니다. 타인(부모)의 결정, 혹은 우연이 개인의 삶의 시작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삶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에 대해, 혹은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자각할 때, 개인은 어떤 의미로던 나름의 성장을 한 이후다. 


그렇기에 삶은 어떤 의미에서 타의적이다.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거대한 목표가 된다. 삶은 그 형태와 기준이 명확치 않다. 수많은 변수로 인해 가볍게 날아가거나, 무겁게 개인을 짓눌러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인간이 시작을 인지하지 못한 채 태어나 어느 정도의 성장을 거쳐 삶을 인식하지만, 정작 삶의 끝자락인 죽음에 대해서는 늘 의식하며 살아간다. 필립 로스는 삶에서 시작해 죽음으로 나아가는 일반적인 흐름을 거슬러, 죽음으로 시작해 삶을 훑어가는 과정을 <에브리맨>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역순의 흐름은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통렬한 고찰이 된다. 이 작품은 서사의 매력이 없다. 문학적, 혹은 소설적인 작업을 거쳐 덜어낸 삶의 단면이 아닌, 삶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죽음 앞에서 천천히 작아지는 것, 견고했던 삶이 지인들이 뿌리는 한줌의 흙으로 덮여가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주인공의 삶은 거칠 것이 없다. 그는 안락한 삶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갖고 있다. 그는 여가 시간에 바다 수영을 즐기며, 911 테러의 위협을 피해 언제든지 이사를 갈 수 있는 사람이다. 광고업계에 뛰어들어 나름대로의 입지를 구축했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내에서 그의 태도에는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자신감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세 번의 결혼을 모두 실패했다. 여성 편력 때문이다. 그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이라는 자신의 삶을 이용해 폭력적이고 적극적으로 여성을 갈아치운다. 그가 여성을 유혹하는, 혹은 여성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성적 매력의 표출이다. 우선 덴마크 모델의 경우가 그렇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 정도 객관화가 이루어졌을 때, 그는 자신의 애인에 대해 허영심이 많고, 빈틈이 많은 여자로 묘사한다. 비교가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자신에 비해 허영심이 많고, 빈틈이 많은 셈이다. 주인공 그가 자신을 거쳐 간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사실상 에너지를 대하는 태도에 가깝다. 그는 아내와의 불화를 염려하면서도 사무실에서 여비서와 짧은 섹스를 나누며 희열을 느낀다. 그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남자다. 그렇기에 그는 수많은 여성들을 탐할 수 있었고, 여성들과의 유희에서 적극적으로 그것을 이용한다. 노인이 된 그가 조깅하는 젊은 여성에게 추파를 던졌을 때, 여성은 가볍게 그의 제안을 무시하고 다른 산책 코스를 선택한다. 스페셜했던 그의 삶은 신체적인 노화에 굴복한다. 굴복의 과정은 녹록치 않다. 그는 자신의 몸에 여러 관을 꽂아내면서도 삶을 연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경동맥 수술 역시 참아내며 삶의 의지를 다진다. 그럼에도 신체는 삐걱거린다. 죽음 앞에서 그는 자신이 이룩해놓았던 모든 삶의 것들을 뒤로한 채 평범한 사람, 에브리맨이 되고 만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 이 작품의 핵심은 개인은 죽음 앞에서 평범해진다, 라는 단순한 명제가 아니다. 개인은 죽음 앞에서 평등해진다, 라는 사실을 알아가며 그 앞에 굴복해가는 개인의 상태가 이 소설의 핵심이다. 그것은 스페셜 맨이었던 개인이 에브리맨이 되어가는 과정을 개인이 인식하는 것을 따라가고 있으며, 소설의 흐름 역시 주인공의 삶에 대한 앎의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 불멸의 다이아몬드와 필멸의 삶이 주는 대비는 명확하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스페셜 맨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에브리맨이다. 우리는 각자 개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은 타인과 정확히 일치할 수 없다. 누구나 고유의 개성을, 영역을, 삶과 관계를 구축하며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스페셜하다. 반면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누군가는 죽음을 미리 앞당겨 선택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다가오는 죽음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시간의 물리적인 흐름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필립 로스는 신체, 즉 물리적인 의미의 죽음을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장치들을 사용하고 있다. 우선 하위라는 인물이 그렇다. 하위는 그보다 연장자이지만 신체적으로 건강하다. 두 인물은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탄탄하다. 그와 하위의 삶에 두드러지는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안정성이다. 그는 하위의 건강한 신체를, 안정적인 가정을 부러워하며 질투한다. 그것은 그가 점차 자신의 죽음을 인식할 때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이야기의 형식은 어떤가? 죽음에서부터 삶으로 거슬러 오르는 이야기의 형식은 엔딩을 앞으로 배치한 영화의 구성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방식은 엔딩을 더욱 강조할 때 사용되는데, 삶이라는 영화의 엔딩이 죽음이라면, 이러한 구성은 작품 내에서 성공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주인공의 삶을 타인의 입으로 증언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떠난 뒤 남겨진 사람들의 시선을 빌려 채워가는 소설의 초반부는 죽음 이후의 공허함을, 혹은 온전히 주인으로 자리했던 개인의 삶이 타인에게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형식적 특성들은 죽음에 이르는 일반적인 흐름이 아닌, 죽음을 통해 삶을 드러내겠다는 필립 로스의 의지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의 장례식을 통해 타인들이 그를 회고한다면, 소설 곳곳에서 그는 아버지의 삶을 회고한다. 아버지는 작은 보석과 시계를 팔아 그와 형을 키워냈다. 그는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상의 목걸이를 모두 합쳐도 살 수 없는 목걸이를 정부에게 선물한다. 그의 삶을 이뤄냈던 아버지의 보석보다 더욱 큰 보석을 선물할 수 있는 경제적인 위치에 올라가 있지만, 그러한 경제적인 부유함이 그의 삶을 책임지지는 못한다. 시계는 협소한 의미로 삶의 흐름을 담고 있는 상징이다. 그의 삶은 부지런히 돌아갔지만, 이제 서서히 시차가 어긋나고, 분침과 초침의 속도가 일치하지 않는다. 안에 있는 부품이 점차 녹슬어가면서 고장이 잦아진다. 


병을 대하는 그의 태도 역시 독특하다. 그는 안정된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에 맞지 않는 집착과 신경증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몸에 관이 꽂히는 상황에 대한 묘사는 압도적이다. 필립 로스는 온전히 신체를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지리멸렬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지리멸렬함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회한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반대의 경우를 가늠한다. 그는 세 번의 결혼을 모두 실패했지만, 한 때는 인생의 동반자였던 각 여인들에 대해 나름의 미련을 갖고 있다. 병든 자신을 지키는 딸 낸시의 삶에 대해서도, 피붙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덤덤한 두 아들의 삶에 대해서도 피해갈 수 없다. 자신의 선택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절절하게 깨닫는다.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림에 대한 재능을 알고 있음에도 윤택한 삶을 위해 광고업계에 입사한다. 말년에 그는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며 자신의 재능을 확인하고자 하지만, 정작 타인에게는 인정을 받음에도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가 녹아있는 부분이다. 


'삶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라는 말을 남긴 사르트르의 말처럼 주인공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나름의 선택을 이어간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 혹은 스쳐갔던 여자들에 대한 선택이기도 하다. 그는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만들어진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나름의 미련과 후회를 곱씹는다. 삶이 가장 비루해지는 순간은 어떤 것을 후회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돌이킬 수 없는 것에서 온다. 인간은 물리적인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 과거, 혹은 회상이라는 단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이러한 삶의 비루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필립 로스의 태도는 담담하고 냉정하다. 원형적인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에 있어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배제한 뒤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에브리맨>은 그것의 증명이다. 


<에브리맨>의 출간은 2008년, 필립 로스의 마지막 작품 <네메시스>의 출간은 2010년이다. 2년 뒤 필립 로스는 절필을 선언한다. '저는 다 끝냈습니다. <네메시스>가 제 마지막 책이 될 겁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말에 어떠한 방식으로 공감해야할지 난감하다. 그가 <에브리맨>을 통해 보여주는, 마치 모든 것을 끝내놓은 것 같은 차분함은 작가가 구상해놓은 어떠한 상징보다도 섬뜩하다.  


우리는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삶을 가져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한 인간의 삶과 그 안의 지리멸렬함을 그대로 구현해내는 대가의 문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습작생으로써 '삶'을 '삶'이라고 적어내기 위해 써내려가고, 지워야만했던 수많은 문장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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