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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누구에게나 우연히 찾아온다. 누구라도 삶의 첫 시작을 다짐하며 어떻게 살아가겠노라고 결심할 수 없다.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직면하는 순간은 이미 삶이 시작되고 난 이후다. 인간이 하나의 생명체로 잉태되는 것 역시 인간 본인의 결정이 개입되는 것은 아니다. 타인(부모)의 결정, 혹은 우연이 개인의 삶의 시작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삶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에 대해, 혹은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자각할 때, 개인은 어떤 의미로던 나름의 성장을 한 이후다. 


그렇기에 삶은 어떤 의미에서 타의적이다.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거대한 목표가 된다. 삶은 그 형태와 기준이 명확치 않다. 수많은 변수로 인해 가볍게 날아가거나, 무겁게 개인을 짓눌러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인간이 시작을 인지하지 못한 채 태어나 어느 정도의 성장을 거쳐 삶을 인식하지만, 정작 삶의 끝자락인 죽음에 대해서는 늘 의식하며 살아간다. 필립 로스는 삶에서 시작해 죽음으로 나아가는 일반적인 흐름을 거슬러, 죽음으로 시작해 삶을 훑어가는 과정을 <에브리맨>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역순의 흐름은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통렬한 고찰이 된다. 이 작품은 서사의 매력이 없다. 문학적, 혹은 소설적인 작업을 거쳐 덜어낸 삶의 단면이 아닌, 삶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죽음 앞에서 천천히 작아지는 것, 견고했던 삶이 지인들이 뿌리는 한줌의 흙으로 덮여가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주인공의 삶은 거칠 것이 없다. 그는 안락한 삶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갖고 있다. 그는 여가 시간에 바다 수영을 즐기며, 911 테러의 위협을 피해 언제든지 이사를 갈 수 있는 사람이다. 광고업계에 뛰어들어 나름대로의 입지를 구축했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내에서 그의 태도에는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자신감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세 번의 결혼을 모두 실패했다. 여성 편력 때문이다. 그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이라는 자신의 삶을 이용해 폭력적이고 적극적으로 여성을 갈아치운다. 그가 여성을 유혹하는, 혹은 여성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성적 매력의 표출이다. 우선 덴마크 모델의 경우가 그렇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 정도 객관화가 이루어졌을 때, 그는 자신의 애인에 대해 허영심이 많고, 빈틈이 많은 여자로 묘사한다. 비교가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자신에 비해 허영심이 많고, 빈틈이 많은 셈이다. 주인공 그가 자신을 거쳐 간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사실상 에너지를 대하는 태도에 가깝다. 그는 아내와의 불화를 염려하면서도 사무실에서 여비서와 짧은 섹스를 나누며 희열을 느낀다. 그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남자다. 그렇기에 그는 수많은 여성들을 탐할 수 있었고, 여성들과의 유희에서 적극적으로 그것을 이용한다. 노인이 된 그가 조깅하는 젊은 여성에게 추파를 던졌을 때, 여성은 가볍게 그의 제안을 무시하고 다른 산책 코스를 선택한다. 스페셜했던 그의 삶은 신체적인 노화에 굴복한다. 굴복의 과정은 녹록치 않다. 그는 자신의 몸에 여러 관을 꽂아내면서도 삶을 연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경동맥 수술 역시 참아내며 삶의 의지를 다진다. 그럼에도 신체는 삐걱거린다. 죽음 앞에서 그는 자신이 이룩해놓았던 모든 삶의 것들을 뒤로한 채 평범한 사람, 에브리맨이 되고 만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 이 작품의 핵심은 개인은 죽음 앞에서 평범해진다, 라는 단순한 명제가 아니다. 개인은 죽음 앞에서 평등해진다, 라는 사실을 알아가며 그 앞에 굴복해가는 개인의 상태가 이 소설의 핵심이다. 그것은 스페셜 맨이었던 개인이 에브리맨이 되어가는 과정을 개인이 인식하는 것을 따라가고 있으며, 소설의 흐름 역시 주인공의 삶에 대한 앎의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 불멸의 다이아몬드와 필멸의 삶이 주는 대비는 명확하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스페셜 맨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에브리맨이다. 우리는 각자 개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은 타인과 정확히 일치할 수 없다. 누구나 고유의 개성을, 영역을, 삶과 관계를 구축하며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스페셜하다. 반면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누군가는 죽음을 미리 앞당겨 선택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다가오는 죽음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시간의 물리적인 흐름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필립 로스는 신체, 즉 물리적인 의미의 죽음을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장치들을 사용하고 있다. 우선 하위라는 인물이 그렇다. 하위는 그보다 연장자이지만 신체적으로 건강하다. 두 인물은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탄탄하다. 그와 하위의 삶에 두드러지는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안정성이다. 그는 하위의 건강한 신체를, 안정적인 가정을 부러워하며 질투한다. 그것은 그가 점차 자신의 죽음을 인식할 때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이야기의 형식은 어떤가? 죽음에서부터 삶으로 거슬러 오르는 이야기의 형식은 엔딩을 앞으로 배치한 영화의 구성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방식은 엔딩을 더욱 강조할 때 사용되는데, 삶이라는 영화의 엔딩이 죽음이라면, 이러한 구성은 작품 내에서 성공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주인공의 삶을 타인의 입으로 증언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떠난 뒤 남겨진 사람들의 시선을 빌려 채워가는 소설의 초반부는 죽음 이후의 공허함을, 혹은 온전히 주인으로 자리했던 개인의 삶이 타인에게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형식적 특성들은 죽음에 이르는 일반적인 흐름이 아닌, 죽음을 통해 삶을 드러내겠다는 필립 로스의 의지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의 장례식을 통해 타인들이 그를 회고한다면, 소설 곳곳에서 그는 아버지의 삶을 회고한다. 아버지는 작은 보석과 시계를 팔아 그와 형을 키워냈다. 그는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상의 목걸이를 모두 합쳐도 살 수 없는 목걸이를 정부에게 선물한다. 그의 삶을 이뤄냈던 아버지의 보석보다 더욱 큰 보석을 선물할 수 있는 경제적인 위치에 올라가 있지만, 그러한 경제적인 부유함이 그의 삶을 책임지지는 못한다. 시계는 협소한 의미로 삶의 흐름을 담고 있는 상징이다. 그의 삶은 부지런히 돌아갔지만, 이제 서서히 시차가 어긋나고, 분침과 초침의 속도가 일치하지 않는다. 안에 있는 부품이 점차 녹슬어가면서 고장이 잦아진다. 


병을 대하는 그의 태도 역시 독특하다. 그는 안정된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에 맞지 않는 집착과 신경증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몸에 관이 꽂히는 상황에 대한 묘사는 압도적이다. 필립 로스는 온전히 신체를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지리멸렬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지리멸렬함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회한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반대의 경우를 가늠한다. 그는 세 번의 결혼을 모두 실패했지만, 한 때는 인생의 동반자였던 각 여인들에 대해 나름의 미련을 갖고 있다. 병든 자신을 지키는 딸 낸시의 삶에 대해서도, 피붙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덤덤한 두 아들의 삶에 대해서도 피해갈 수 없다. 자신의 선택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절절하게 깨닫는다.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림에 대한 재능을 알고 있음에도 윤택한 삶을 위해 광고업계에 입사한다. 말년에 그는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며 자신의 재능을 확인하고자 하지만, 정작 타인에게는 인정을 받음에도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가 녹아있는 부분이다. 


'삶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라는 말을 남긴 사르트르의 말처럼 주인공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나름의 선택을 이어간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 혹은 스쳐갔던 여자들에 대한 선택이기도 하다. 그는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만들어진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나름의 미련과 후회를 곱씹는다. 삶이 가장 비루해지는 순간은 어떤 것을 후회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돌이킬 수 없는 것에서 온다. 인간은 물리적인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 과거, 혹은 회상이라는 단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이러한 삶의 비루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필립 로스의 태도는 담담하고 냉정하다. 원형적인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에 있어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배제한 뒤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에브리맨>은 그것의 증명이다. 


<에브리맨>의 출간은 2008년, 필립 로스의 마지막 작품 <네메시스>의 출간은 2010년이다. 2년 뒤 필립 로스는 절필을 선언한다. '저는 다 끝냈습니다. <네메시스>가 제 마지막 책이 될 겁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말에 어떠한 방식으로 공감해야할지 난감하다. 그가 <에브리맨>을 통해 보여주는, 마치 모든 것을 끝내놓은 것 같은 차분함은 작가가 구상해놓은 어떠한 상징보다도 섬뜩하다.  


우리는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삶을 가져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한 인간의 삶과 그 안의 지리멸렬함을 그대로 구현해내는 대가의 문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습작생으로써 '삶'을 '삶'이라고 적어내기 위해 써내려가고, 지워야만했던 수많은 문장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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