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TAEHWAN

조지아 독감이 뉴욕을 휩쓴다. 전 세계로 퍼져나간 바이러스는 21세기 문명을 순식간에 파괴한다. 세계 인구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실종된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을 택한다. 누군가는 공항에 남고, 누군가는 떠난다. 공항 사람들은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삶의 방식을 교류한다. 사슴을 사냥해 가죽을 손질하고, 내장을 발라내 개에게 주는 방법을, 누군가의 삶에 대해 깊게 묻지 않는 방법을 배운다. 질서를 깨뜨린 강간범의 호소를 묵살하는 냉정함까지도. 이들의 질서와 가치는 우리가 살아왔던 문명,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그들은 오직 이 관계를 유지하고, 기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여러 수집품들을 모아 박물관에는 아이패드, 스마트폰, 바이크, 안락의자, 주식회사의 비밀이 담긴 찌라시와 보고서, 누군가의 여권과 신용카드까지 모두 전시되어 있다. 오늘도 그들은 유물이 되어버린 것들의 먼지를 턴다. 오로지 잊지 않기 위해서다. 어쩔 수 없이 살아남은 이들이 저마다의 삶을 위해 나아갈 때, 기억은 그들이 가진 유일한 나침반이 된다.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를 떠돌며 무대를 만드는 유랑극단이 있다.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공연한다. 관객은 그리 많지 않다. 유랑극단과 관객 모두에게 셰익스피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과거일뿐이다. 유랑극단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상영하는 이유는 늘 그래왔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유랑극단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희곡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실패한다. 어떤 문장을 써내려가더라도, 반평생을 연기해왔던 셰익스피어의 자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유랑극단은 예언자가 지배하는 마을에 도착하고, 예언자가 유랑극단 중 한 명을 아내로 요구한다. 거절과 동시에 그들은 예언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조지아 독감이 가져온 종말은 비슷했지만 주인공들의 기억은 다르다. 커스틴은 어릴 적 아서가 넘겨준 만화책을 통해 세계를 기억한다. 안타깝게도 이 만화의 결말은 없다. 뒷이야기는 그녀를 비롯한 생존자들이 적어내야만 한다. 공항에 남아있던 한 소년은 늘 성경을 놓지 않았고, 성경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는 신이자 예언자가 된다. 사람들을 지배하고,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여성들을 납치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희망을 지배하는 동시에, 모두의 희망이 되기를 원한다. 클라크, 지반, 어거스틴, 디터 모두에게 기억은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된다. 정말 대단한 헤프닝이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올 때까지 그들은 기억을 붙잡으려 한다. 

먼지가 흩날리는 폐허, 길거리에 널린 시쳇더미,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희망을 붙잡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전기를 발견하고, 불을 피워 빵을 구워 이웃에게 나눈다. 그들은 생존을 넘어 더 큰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커스틴의 팔에 새긴 문신처럼, 생존만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