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이니치」
코지는 말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자이니치라는 말은 들어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자이니치는 무엇인가? 재일(在日) 한국인과 북한인 등을 지칭하는 일본말이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시절부터 현재까지 일본에 살고 있는 ‘한반도’ 출신자들을 일컫는다. 대부분의 자이니치들은 일제강점기에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거나, 2차 세계대전 이후 강제 징용에 의해 끌려갔다.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 현재 그들의 2세들이 일본에 머무르고 있다.
「자이니치」는 이러한 사람들의 삶을 다룬 연극이다. 야쿠자였던 둘째 히사시의 죽음을 통해 첫째 이치로, 셋째 카네토, 넷째 토모야키, 막내 코지가 한 자리에 모인다. 히사시의 장례식장에서 만나고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2. 일본과 한국, 조총련과 민단
「자이니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성이 넘친다. 그들은 정(精)이라고 통용되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형제들의 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립각을 세우며 끊임없이 싸운다. 그들은 서로에게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공통분모가 나뉘어져 있다.
우선 국가다. 관객들은 극의 시작에서 나오는 일본어와, 그들의 히사시의 죽음을 대하는 장례식장의 풍경을 볼 때 그들의 국적을 일본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위에서 짚었듯이, 이치로, 히사시, 카네토, 토모야키, 코지는 자이니치이고, 그들의 국적은 한국이다. 영화 기업가 박기환 역시 한국인이다. 애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국적은 모두 한국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이질감 없이 한국인이라고 느낄 수 있는 인물은 박기환 한 명 뿐이라는 점이다. 박기환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히사시의 지원을 받는다. 영화는 실패하게 되면서 그는 20억이라는 큰 액수의 빚을 지게 된다. 빚 탕감을 위해 그의 유골을 운반하는 업무를 맡는다. 박기환은 자이니치 4형제를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극의 후반부에서 여권을 꺼내든다. 애국가를 부르며 형제와 자신간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구분한다. 극 중 내내 다소 비굴한 태도를 일관하던 박기환의 태도는 극 후반부, 진실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변한다. 그는 이 시대의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이익, 박기환의 대사를 빌리자면 ‘비즈니스의 논리’로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는 자이니치에 대한 고려가 없는 인물이다. 민족적 정체성과 그에 따른 상황들, 혹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고려는 보여주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자본의 원리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극 중에서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협상을 돌리기 위해 자신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코지에게 더욱 호감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거리감은 그들이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장소에 기인한다. 박기환과 코지는 둘 다 한국에서 살아가고 활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코지와의 교감은 무너지고 만다. 코지가 마지막에 떠나는 박기환에게 소리치는 대사는 일본어다. 물론 극 중 등장하는 일본어는 셋째 카네토의 개입으로 인해 대부분 번역되지만, 마지막에 코지가 날리는 대사만이 온전한 일본어로 남는다. 그 일본어 대사의 뜻은, ‘나도 한국인이라고! 우리 형제들 패스포트 따위 없어도 모두 한국인이라고!’이다. 극 중 온전한 일본어로 드러나는 이 대사는 결국 일본어로 남아 관객에게는 완벽하게 전달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박기환을 제외한, 형제들의 관계는 어떤가? 그들이 나뉘는 기준은 이데올로기다. 카네토와 토모야키는 조총련 소속이다. 친북한계 단체다. 셋째 카네토의 말투 억양은 다소 독특하다. 조국에 대한 배신을 언급하는 그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지향성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치로와 코지는 민단 소속이다. 민단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줄임말로, 조총련과 마찬가지로 재일한국인을 위한 단체이지만 서로의 정치적 노선,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조총련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데올로기는 양분화가 불가능한 개념이다. 그러나 극 중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눈에 띄게 선명하다. 특히 형제들이 주고받는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토모야키에 비해 카네토는 더욱 확실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치로와 코지를 조국을 배신한 자들로 몰아간다. 이치로와 코지는 다르다. 코지는 재일동포 야구선수로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자본주의적 논리에 편입해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극 중에서 가장 관객들과 거리감이 없는 인물로,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타당한 방법으로 한국 사회에서 적응을 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장 크게 대립하는 것은 코지와 나머지 형제들이다. 코지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형제들과 공통분모를 두지 않는다. 그것은 온전한 자신의 몫이다. 극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코지가 느꼈을 외로움과 자이니치로써의 정체성 혼란 등을 예상할 수 있다. 그것들을 이겨내고 온전히 자신의 몫을 쟁취한 코지로써는 형들의 선택이 다소 강압적이고,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가 자신의 의견을 돌리는 것 역시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관념의 경계선은 형제들과의 공감과 사랑이 확인될 때 거품처럼 사라진다. 카네토와 토모야키 역시 코지의 성공을 인정한다. 공감이 이루어진 순간, 이데올로기는 필요 없다.
3. 우매보시
토모야키는 코지를 위해 유골을 일본에 뿌린다. 극 후반부에서 유골을 대신하는 것은 우매보시이다. 우매보시는 매실이다. 같은 열매이지만 국경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갖는다. 우매보시의 언급은 극 중 다소 직접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주제를 핵심적으로 전달하는 상관물이다.
자이니치들은 뭐라고 불리는가? 한국에서는 재일 동포로, 일본에서는 자이니치로 불린다. 그들은 온전한 한국인 혹은 일본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우선 한국을 보자. 다소 서투른 한국말 실력을 제외하고라도 그들은 애한국인으로써의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조건은 민족적 정체성이다. 우리는 수없이 ‘단일민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언론과 미디어, 교과서가 그렇다. 현재 발생하는 다문화 현상과 그에 따른 문제들 역시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사회적 풍토에 책임을 요구하는 경향이 나타나곤 한다. 재일동포들은 겉모습으로는 일본과 한국을 구분할 수 없다. 그들이 일본과 한국의 언저리에 위치한 것은 자의도 분명 존재하지만, 타의로 진행된 점이 더욱 크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과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만들어낸 비극적인 결과다. 일본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일본과의 역사적 측면에서의 접점과 굴욕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운명 역시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큰 측면에서는 국가와 국가, 혹은 사회와 사회 사이에서 희생된 희생자들이다. 일본에서의 경우 마찬가지다. 자이니치들은 우리 주변에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역시 차별과 멸시를 받는다. 대표적인 예로 추성훈을 들 수 있다. 추성훈은 일본에서 운동을 시작했지만 한국으로 건너온다. 그러나 유도계에서의 파벌 싸움, 국적과 정체성에 대한 멸시와 차별 등으로 다시 일본으로 귀화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조센징, 한국에서는 쪽바리로 멸시를 받는다. 그는 2001년에 3년 7개월간의 활동을 마치고, 귀화를 조건으로 일본 대표 선수가 된다.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선수 안동진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건다. 이충성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대표팀 예비 선수 시절을 고백한다. 일본에서의 멸시를 피해 한국에 동경을 가졌지만, 막상 한국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의 경험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어디에도 소속감을 갖지 못하는 자이니치들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자이니치의 상황은 단순히 스포츠에서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주변에 있는 일반적인 자이니치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일본에서는 우매보시, 한국에서는 매실이다. 우매보시와 달리 자이니치의 삶은 사뭇 다르다. 각각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우매보시와 매실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은 한국에서는 쪽바리,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다. 코지의 성공 역시 두 스포츠스타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성공에 대한 자부심과, 형들과의 연대를 거부하는 코지의 행동의 근거가 된다.
4. 임진강
그들이 15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것은 둘째 히사시의 죽음 때문이다.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그들이 그 전까지는 교류가 없었음을, 서로에게 그리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은 형제간의 냉기류와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그들의 다툼이나 우스꽝스러운 농담들, 관객들이 흥미를 갖는 포인트 역시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히사시의 유언이 장례식장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유언은 다음과 같다. 각 형제들이 자리에 모여 한 끼 식사를 같이 하는 것, 자신이 좋아했던 춤을 추는 것, 임진강을 불러줄 것이었다. 물론 토모다키가 쓴 유언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효력은 없다. 허나 토모다키의 대사를 통해 히사시가 늘 원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유언을 이행하는 형제들의 모습과 그에 따른 다툼이 극을 이끌어간다.
극 중 노래에 등장하는 임진강은 함경남도와 황해북도, 파주를 잇는 강이다. 이 강을 한국과 북한의 영토 중 어디인지 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미 인위적으로 세워놓은 삼팔선을 관통하는 강이기 때문이다. 자이니치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이니치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 그 언저리에서 흘러가는 강이다. 그들의 정체성과 국적을 의도적으로 구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임진강을 나눌 수는 없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의 초반부와 후반부에서 기타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임진강의 노래는 의미심장하다. 임진강은 자이니치들의 현재 입장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들 사이에서 발생했던 나름의 생존 방식과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툼이 해결을 맞는 순간은 굳게 닫혀있던 마음이 이해를 거쳐 공감으로 향하는 순간이다. 공감을 이루는 조건은 바로 히사시의 죽음이다. 피가 섞인 형제들의 죽음이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당연한 감정 중의 하나다. 히사시의 죽음은 쓰나미라는 소재와 방사능으로 오염된 후쿠시마의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의 패권 다툼이나 형제들의 개입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히사시의 죽음으로 15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다. 또 하나는 박기환의 존재다. 박기환은 그들의 갈등을 중재하는 중재자로 등장하지만 결말부에서 그는 그들을 배신한다. 자본주의 논리, 즉 자신의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떠난 박기환을 붙잡지 못한다. 그들 사이에 공감대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뿌려진 유골을 대신해 그들이 넣는 것은 손톱과 머리카락, 그리고 우매보시 씨앗이다. 손톱과 머리카락은 국가와 사회로 구분되지 않는다. 인간이 가장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신의 흔적과 뿌리이다. 자신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을 유골 대신 넣는 것이다. 우매보시 역시 마찬가지다. 위에서 짚었던 것처럼 우매보시는 그들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상관물인데, 유골 대신 들어가는 우매보시 씨앗은 그 어디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그들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좁혀질 것 같지 않던 간극이 좁혀지는 순간, 그것은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들을 감싸고 있던 방어기제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고, 서로 발을 붙이고 사는 장소에 대한 구분이 사라졌을 때이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의 긍정적인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현재 자이니치들의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가슴 아픈 결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공감과 이해
이 연극을 통해 자이니치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그들의 삶이 바뀔 수 있을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코지는 말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자이니치라는 말은 들어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자이니치는 우리에게 분명 가까운 사람들은 아니다.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저 어렴풋이 남아있는 흐릿한 사람들일 뿐이다. 우리는 이 연극에 공감할 수 없을지 모른다. 설령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비윤리적인 사실은 더더욱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접점이 없는 것은 사실이니까. 우리는 그것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 연극과 소설, 시와 같은 문학을 통해서, 혹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것이 자이니치의 삶이다. 그것은 그들이 겪을 수많은 삶의 단면들 중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같은 생물학적 조건을 갖고 태어난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것은 후천적인 환경적 조건이다. 코지의 성공은 그것들에 대한 냉정한 통찰이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조건을 딛고 ‘단일민족’ 한국인에 비해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다. 성공은 필수 조건이 국적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서 과연 우리에게 책임감이 없을까. 글쎄, 냉정하게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